삼성 이건희 회장 일화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일 대구에서 태어났고 2020년 10월 25일 새벽 별세. 향년 78세입니다. 그분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있겠지만 삼성전자를 명실상부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류 기업으로 만든 것은 이건희 회장임은 분명합니다. 공과를 평가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도 있고 인물됨이나 회사를 경영하면서 논란이 되는 오류들도 분명 있지만 오늘의 삼성이 대한민국의 기업으로서 갖고 있는 의미가 폄하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 일화들을 모아봤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어떤 일화들은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는, 본받아야할 부분들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회장 / 위키피디아

 

블룸버그에서는 별세 소식을 전하며 "삼성을 변신시킨 한국의 아이콘"이라고 이건희 회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조품 제작자에서 탐내는 첨단장비 브랜드가 되었다" 2005년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이건희 회장은 LA의 전자제품 매장에서 회사 제품에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고 삼성전자를 점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값싸고 품질이 낮은 제품을 만들던 회사에서 매출이 감소하더라도 구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 1993년 경입니다.

 

1993년은 삼성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입니다. LA 가전매장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삼성의 제품을 보고 타회사 제품을 분해하고 분석하는데 매진하도록 하고 디자인 고문으로 직접 스카우트한 교세라의 후쿠다 다미오의 보고서를 통해 국내 1위라는 자만에 빠진 삼성, 외국인 고문의 얘기는 듣지 않으려는 텃새 등에 한 보고서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삼성의 세탁기 뚜껑이 사건이 터집니다. 세탁기 여닫이 문 뚜껑이 맞지 않자 직원들이 2 mm 정도를 칼로 깎아내고 대충 조립하는 장면이  SBC(삼성 사내 방송)의 몰래 카메라에 잡힌 것이죠. 이건희 회장은 모든 사장, 임원을 프랑크푸르트에 집합시키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언합니다. 삼성의 당시 가전제품들은 국내 1위를 다퉜지만 VTR은 테이프를 갉아먹었고, TV는 시청 도중 퓨즈가 나가기도 하는 제품들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이건희 회장은 "암으로 치면 2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고 전해지죠. 전자제품에 있어서 불량은 "암"이라는 것입니다. 불량은 범죄라는 것도 그래서 나온 철학입니다. 

 

삼성전자 애니콜화형식

 

요즘 메타인지라는 개념이 많이 나옵니다. 삼성전자의 혁신은 바로 회장 스스로 삼성전자의 한계를 정확히 인정하고 변화를 적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에세이에서 "한국 기업의 푸오는 세계 삼류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느끼기보다는 국내 정상이라는 우물 속 평온함을 즐기고 안도감에 젖기를 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불량제품 0(제로)에 도전하고 초일류를 향해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가 가능했던 것이죠.

 

* 2016년에 갤노트7 리콜 당시 1994년 무선전화 화형식이 함께 거론되곤 했습니다. 당시의 불량률이 11.8%에 달했다고 전해지는데요. 2016년 갤노트7은 휴대폰 발화가 원인으로 전량 리콜을 단행했습니다. 여기에는 이건희 회장의 품질경영이 한몫했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말들

 

"앞으로 세상에서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 개성화로 간다. 자기 개성의 상품화, 디자인화, 인간공학을 개발해서.. 성능이고 질이고는 이제 생산기술이 다 비슷해진단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요즘 삼성의 비스포크를 보면서 디자인 중심경영이라는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하면 된다는 [헝그리 정신]과 남을 뒤쫓아가는 [모방정신]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성장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재래식 모방과 헝그리 정신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율적이고도 창의적인 주인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신바람이 나서 정열적으로 일하고 그 속에서 자아실현이라는 기쁨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자율과 창의가 21세기 새로운 발전의 원동력이자 정신적 추진력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품질이나 성능은 점차 평준화 되기 때문에 차별적인 경쟁무기는 인간의 지적 창의력이 부의 ㅡ기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10년을 내다보면서 세계 표준이 될 수 있는 기술개발과 무형자산을 확대하는데 그룹의 경영력을 집중해 나가야..
(1997년 1월 신년사 :  IMF 사태 직전으로 위기의식을 강조)

 

삼성의 다양한 제품들이 지금은 초일류를 다투고 있지만 지금 세계적으로도 단연 휴대폰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인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는 남자와 여자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다. 이는 실로 인적자원의 국가적 낭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탁아소나 유치원을 많이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기업도 여성에게 취업 문호를 활짝 열고 취업활동을 지원하는 인프라를 구비해줘야 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이에 따라 당사자가 겪게 될 좌절감은 차치하고라도 기업 손실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1997년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중)

 

이밖에도 이건희 회장의 많은 말들은 항상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위기를 극복하거나 앞으로를 대비해야한다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인재를 영입하거나 기술을 개발하거나 디자인 혁신을 이루거나 품질을 개선하는 등 모든 부분에서 지금 혁신을 이뤄내야만 앞으로 10년을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는 변화에 대비하는 방식이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며,

실맄콘밸리 견학을 하며 신산업 구상을 하던 이건희 회장이 한국반도체 인수를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에게 건의했으나 위험하다고 거절당했지만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반도체산업의 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가 1970년대 초였고 이후 1977년 이병철회장은 3남인 이건희를 공식 후계자로 발표합니다. 경영능력에 있어서 두 형들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고 하는데 1966년 당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에 이맹희, 이창희 씨가 관여된 것으로 드러나 이병철 회장이 책임지고 회장을 사임했으며, 은퇴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이건희 회장을 선택하게 된 계기라고 하죠. 물론 이후 이맹희씨가 총수대행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삼성그룹이 이 기간 큰 혼란을 겪게 되어 이건희 회장으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과는 달리 삼성은 하청업체나 직원의 고통에 대해 비정한 모습을 보이거나 승계문제에 있어서도 문제를 일으켜 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 책임이 적지 않죠. 분명 초일류기업을 일궈낸 공이 있으나 비자금조성 같은 과도 있었습니다. 또 2016년엔 뉴스타파에 의해 전해진 불미스러운 의혹도 있었습니다. 삼성의 내부고발자인 김용철 변호사의 저서에서도 삼성의 경영태도는 "실화냐?" 싶을 정도입니다.

 

잘못된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부분도 있었지만 한 기업인으로서의 성과와 대한민국의 오늘을 견인한 대단한 기업인이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르 대비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부분은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서 계속 성장하고 그에 걸맞는 책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 존경받는 기업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건희 회장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에도 이미 폐 림프절 암을 앓았고 폐질환이 가족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병철회장도 폐암 투병등 가족력 후유증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